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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도슨트 1회: 11:00 - 11:30 / 2회: 14:00 - 14:30 / 3회: 16:00 - 16:30

안녕하세요. 한향림옹기박물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지금부터 2025년 특별기획전 ‘흙으로 빚어 불로 만든 그릇, 독불장군’ 전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전시 제목인 독불장군은 장독대 할 때 ‘독’과 액체류를 담던 용기 ‘장군’ 사이에 뜨거운 ‘불’을 넣어 독불장군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흙을 빚어내어 가마에서 불로 구워졌다는 의미입니다. 보통은 고집이 세서 자신의 의지를 잘 굽히지 않는 사람을 독불장군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독불장군의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옹골차게 옹기를 만든 장인’의 고집에 방점을 두었습니다.
그럼 1층 벽면에 있는 도표 ‘우리나라 옹기의 발전’을 볼게요. 우리가 흔히들 도자기라고 하는데요. 이는 도기와 자기를 합쳐서 이르는 말입니다. 그럼, 도기와 자기는 어떻게 다른 걸까요. 자기는 고려자기, 청화백자 할 때 그 자기입니다. 우리 가정에 흔히 있는 식기류도 대부분 자기에 속해요. 무언가 예쁘고 고급스러운 느낌이 있지요. 그러면 도기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우리 박물관에 있는 이 옹기가 바로 도기에 속합니다. 토기부터 연질도기, 경질도기, 옹기까지 모두 도기에 속해요. 어쩐지 고급스럽다기보다는 투박하고 정겨운 느낌이 들지 않나요? 도기와 자기를 구분하는 가장 큰 두 가지는 그릇을 굽는 소성 온도와 재료인 흙의 성분, 즉 ‘태도(胎土)’입니다. 먼저 자기는 1,28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집니다. 이에 반해 도기의 소성 온도는 그보다 낮은 800도에서 1,150도이고 옹기의 경우 1,100도에서 1,150도 내외에서 소성됩니다. 두 번째, 태도의 경우는 자기를 만들 때 쓰는 자기토와 도기나 옹기를 만들 때 사용하는 점토가 있습니다. 옹기를 만드는 태토의 경우는 낮은 산자락에서 채취하는데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재료를 구하기 쉽고 굽는 온도도 비교적 낮은 옹기는 예로부터 신분과 귀천에 관계없이 생활 용기로 널리 쓰여 왔답니다.
도표에 적힌 바와 같이 우리나라에서 옹기가 지금의 형태로 자리 잡은 시기는 고려시대입니다. 왜 고려시대일까요? 약 10세기를 전후한 고려 초 이른바 고려청자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과 관련이 있어요. 이후 청자는 조선시대 들어 분청사기로 변화하고 조선 도공들은 다시 청화백자, 철화백자 등을 만들어 냅니다. 조선시대 백자는 성리학의 철학적 정신을 반영하며 왕실과 사대부 사회에서 다양하게 발전합니다. 다시 말해서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상류층의 자기 문화의 다른 한 편에 옹기가 있었던 셈입니다. 비로소 옹기는 생활 용기로써 자리 잡고 신분의 고하와 상관없이 우리 민족의 삶 곳곳에 쓰이게 됩니다.
옹기는 크게 질과 오지로 구분해 볼 수 있어요. 처음에는 질그릇을 사용하다 조선시대에 오지그릇이 만들어지고 나중엔 질그릇이나 오지그릇 모두 그 용도에 맞게 사용됩니다. 한향림옹기박물관 1층은 오지항아리를 중심으로 옹기를 지역별로 분류해 전시하였고 2층은 질그릇과 유약 대신 소금으로 유리질을 입힌 푸레그릇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1층 소품실에는 양념단지, 벌통, 지석, 확독 등 생활용품으로 사용되었던 옹기들이 설명과 함께 진열되어 있으니 제 해설이 끝난 후 자유롭게 둘러보세요. 그럼 2층 특별기획전시실로 올라가 이번 전시에 대해 본격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캐릭터 두 명이 서 있네요. 옹기대장과 건아꾼입니다. 이름이 낯설죠? 옹기를 만드는 사람들끼리 사용했던 말로 지금도 쓰이고 있는 소위 업계 용어입니다. 옷은 모두 한복을 입고 있어요. 이유는 본 전시의 시대적 배경을 1900년대 초로 설정했기 때문입니다. 한향림옹기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옹기는 조선시대 중기에서 1950년대 이전의 것들입니다. 특히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시기의 옹기가 가장 많아요. 요즘은 가스나 전기를 연료로 옹기를 소성하고 어떤 경우 석고 틀을 이용해 기형을 찍어내기도 합니다. 지금도 재래식 장작가마를 고집하는 옹기장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전통 방식의 옹기 제작 방식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어요. 그래서 이 점을 여러분께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과연 그 시절 옹기는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때 옹기 가마터는 어떤 분위기였는지 말이에요. 그럼, 옹기를 만들던 구성원들을 알아볼게요. 맴버는 크게 네 부류로 나뉘어요. 직함은 전주, 옹기대장, 건아꾼, 뒷일꾼입니다. 우선 전주는 말 그대로 ‘쩐주’ 즉, 투자자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사장님이지요. 옹기를 구울 때 필요한 자금과 운영을 맡고 있어요. 두 번째는 옹기대장이에요. 옹기를 만드는 전문 기술자입니다.
세 번째로 건아꾼은 옹기대장의 보조기술자로 옹기 제작 전반에 걸쳐 중요한 일을 해요. 무엇보다. 흙을 반죽하고 다 만든 옹기가 갈라지거나 파손되지 않도록 관리하지요. 이후 옹기에 잿물을 바르거나 옹기가 잘 마르도록 세심히 살피는 역할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뒷일꾼이에요. 흙을 채취하거나 걸러내는 일, 장작을 나르거나 옹기를 옮기고 밥을 해 주는 등 기술이 필요치 않은 허드렛일을 해요. 그러나 옹기 가마터에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실제 이들이 있어 가마터의 분위기가 북적북적 활기가 넘쳐나죠.
이제 옹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 제작 과정을 살펴볼게요. 도표에 보이는 바와 같이 순서대로 따라가 볼게요. 먼저 점토를 채취하고 채취한 점토는 ‘수비’라는 과정을 거칩니다. 수비란 채취한 흙을 물에 걸러내는 작업인데 이 과정을 통해 고운 흙을 얻어요. 수비를 마친 흙은 작업장에 쌓아놓고 물기를 뺀 후 반죽합니다. 반죽은 ‘깨끼질’과 ‘뚝메질’을 반복해요. 깨끼질은 깨끼칼로 흙덩이를 긁어내면서 작은 돌을 일일이 제거하는 과정으로 이 과정에서 흙이 골고루 배합되고 흙 속에 있는 잡물과 공기가 제거됩니다. 뚝메질은 ‘흙고지기’라고도 하는데 나무 망치인 ‘곧메’로 쳐서 흙을 찰지게 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면 찰진 흙이 만들어지고 건아꾼은 이 흙으로 질가래를 만들어 옹기대장에게 공수합니다. 옹기대장은 질가래를 이용한 타림질 기법으로 옹기를 만들어요. 다 만들어진 옹기는 건조 후 잿물을 입히는 시유 과정을 거쳐 다시 한번 말려 줍니다. 이렇게 한 가마를 채울 만큼의 옹기가 만들어지면 드디어 가마에 쌓아요. 이 과정을 ‘가마재임’이라고 하는데 전통 방식의 통가마는 경사진 언덕을 타고 만들었기 때문에 바닥이 평평하지 않아요. 그래서 옹기를 잘못 쌓으면 무너지고 말지요. 옹기를 쌓는 것을 ‘서리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옹기대장이 담당해요. 옹기에 수평을 맞추기 위하여 고임돌을 대고 서리는데 가마재임을 완벽히 할 줄 알아야만 제대로 된 옹기대장으로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드디어 옹기가 가마 안에 가득 채워졌어요. 이제는 불을 때 굽는 일만 남았죠. 여기서부터가 진짜 중요해요. 불에 굽기 전의 옹기는 아직 흙덩이에 불과하니까요. 소성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단단하고 물이 새지 않는 진짜 옹기로 다시 태어나요. 사람의 손을 떠난 옹기가 잘 구워질 수 있도록 고사를 지내고 피움불을 시작으로 옹기 소성이 시작됩니다.
소성의 단계는 피움불, 중불, 한불, 창불이라는 4단계를 거칩니다. 100°C에서 200°C 내외의 온도로 때주는 피움불은 옹기가 아직 머금고 있는 수분과 가마 안에 습기를 제거해 주는 단계예요. 갑자기 불의 온도를 높이면 옹기는 부서지고 말아요. 사흘에서 길게는 열흘에 이르는 기간 동안 ‘피움불을 지피고 나면 중불로 넘어 가는데 이때 온도가 400°C에서 800°C입니다. 중불에서는 옹기에 검은 그을임(검댕)이 묻는데 계속해서 불을 키워나가면 옹기에 묻은 ‘검댕’은 열에 연소되어 없어집니다. 이를 ‘벗긴다’라고 해서 중불을 ‘배낌불’이라고도 불러요. 불의 온도를 더 올려 1,100°C에 이르는 한불 단계에서는 갑자기 온도를 올려도 옹기가 파손되지 않아요. 통가마는 입구인 불통에서 가장 윗부분인 굴뚝까지 20M에서 길게는 40M까지 늘어져 있어요. 아무리 불통에 나무를 넣어도 굴뚝 부분은 입구보다 열이 덜 미치게 마련이죠. 이 때문에 가마등에 차례로 뚫려 있는 구멍, 창구멍(창불구멍)에 나무를 넣어 줘야 해요. 이 과정을 ‘창불’이라고 하는데 밑에서부터 차례로 올라가며 솔가지를 투입하여 마지막까지 온도를 올려줍니다. 이 단계에서 약 1,150°C까지 온도가 올라가는데 예전 옹기대장은 불의 색깔을 보고 창불 단계의 마침을 결정했어요. 옹기대장의 지시에 따라 장작의 투입이 끝나면 가마에 나 있는 모든 구멍을 막아 줍니다. 내화벽돌이나 진흙을 이용해 불통, 화문, 창구멍, 굴뚝을 모두 막은 후 밀폐된 가마 안에서 옹기를 서서히 식힙니다. 최소 이틀, 많게는 닷새 이상 걸렸다고 해요.
자, 이제 가마는 다 식었습니다. 옹기를 꺼내야지요. 화문을 열고 가마 안에 옹기를 꺼냅니다. 옹기는 마당에 줄을 지어 늘어놓아요. 상품 가치가 있는 옹기를 분류해 크기와 종류별로 10개씩 줄을 맞춰 세워놓고 6:3:1의 비율로 분배했어요. 이를 ‘와릿제’라고 하는데 전주가 60%, 옹기대장이 30%, 건아꾼이 10%를 가져 갔어요. 아! 뒷일꾼은 왜 빠졌냐구요? 뒷일꾼의 몫은 전주가 감당했어요. 아무래도 투자를 많이 한 전주가 가장 많은 몫을 차지했지만 그만큼 책임질 일도 많았지요. 1900년대 초는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우리 역사에서는 힘들고 아픈 시기였어요. 하지만 그래도 삶을 일구는 사람들의 모습은 지금과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옹기를 만들고 굽던 사람들. 그들은 어려웠던 시기 산업의 현장에서 땀 흘려 일하던 노동자들이었어요. 저는 이 전시를 통해서 옹기와 옹기마을, 그리고 옹기를 만들던 사람들이 살았던 생생했던 당시의 이야기를 전해드리고 싶었어요. 어떠셨나요? 도움이 되셨나요? 저의 해설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